
“그러니까.”
“또 누가 설치고 다닌다고?”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가 그들의 회의실 안에서 잔잔히 울린다. 동시에 방은 한 남자의 손에 들린 시가향으로 가득했지만, 그 안에 있는 누구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시가를 피우고 있던 남자의 옆에 있는 또 다른 이가 서류를 넘기며 입을 열었다.
“그, 왜 있잖습니까. 빙제의 뒤를 잇겠다고 온갖 난리를 쳐대던 녀석들 말입니다.”
시가를 받침대에 내려놓은 남자는 그들의 존재를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듯 너스레를 떨며 답했다.
“아, 걔네.”
“원래도 정신 나간 놈들만 잔뜩 꼬여있는데 그중에서도 유독 또라이인 놈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놈을 중심으로 기류가 영 이상하다고요.”
“그럼, 다음은 그 녀석들로 할게.”
가볍게 떠들어대는 남자를 무시하고 서류를 테이블에 탁탁 내려놓아 정리하던 그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번엔 말처럼 쉽지 않을 것 같아서 얘기하는 겁니다. 중심 역할 자처하는 놈이 또라이는 또라인데 지 목숨을 누구보다 소중히 하는 또라이라고요.”
“하하, 그래?”
“사람 속 터질 것 같으니까 웃지 마십쇼. 뭔 일을 꾸미는 건 확실한데 집 밖을 나갈 줄 모릅니다. 항상 집 안에 콕 박혀서 나올 생각을 안 하는데 그 와중에 집은 또 어찌나 보안이 삼엄하던지, 거기서 또 다른 미친 놈들 불러 모아 작당모의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원. 당신 보낼 바엔 내가 가고 말지.”
“나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거 같네.”
“당신이란 사람은 애초에 존재감이 너무 큽니다. 외양부터가 눈에 띄잖습니까. 근데 그놈들을 집 밖으로 나오게끔 해야 하는데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으니 차라리 원래부터 암살자 노릇하던 내가 그 집에 몰래 들어가 처리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었던 것뿐이고요.”
말투는 신랄하지만, 냉정한 그의 의견에 나름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그럼 너의 뜻대로 하자고 넙죽 동의할 뻔했다. 하지만 남자는 자신이 보유한 패를 이르게 드러내고 싶진 않았다. 결국 자신이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도 난 내가 나름대로 암살에 능하다고 생각했는데, 뭐, 너의 눈으로 보기엔 아직 부족한 점이 많겠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눈꼬리를 휘던 남자는 자신이 때마침 떠올린 방법을 전직 암살자에게 전했다.
“그러면 이렇게 하는 건 어때. 내가 기억을 잃은 척하는 거야.”
“제정신입니까?”
차가운 답변이 돌아왔지만, 남자는 자신의 의견을 꿋꿋이 얘기했다.
“네가 또라이라고 지칭하는 그들이 노리는 표적은 나라는 걸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 그들이 따르고 신봉하는 ‘그’ 빙제를 내가 죽였으니, 걔네 입장에선 내가 얼마나 증오스럽겠어. 그러니 내가 기억을 잃은 척하고 어디 외딴집에 잠시 머물러 있으면 분노로 알아서들 기어 나올걸.”
“아, 그래서 당신이 혼자 나서서 몸빵을 자처하시겠다?”
“그게 효율적인걸. 쉽고, 뒷말 없고, 간단하잖아?”
남자의 말을 들은 그가 테이블에 놓여 약간의 위스키를 담은 온더락잔을 흘긋 바라보더니 이내 그 잔을 남자의 얼굴에 던져버리고 싶다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는 그 표정을 시선을 돌려 회피했다. 결국 그 고집에 꺾인 그는 자포자기했다는 듯, 최소한의 품위만큼은 지키려던 행동거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교양 따위 내다 버린 자세만이 남았다.
“예, 당신이 하고 싶은 거 다~ 하십쇼. 더럽게 맘에 안 들지만 이런 것도 우리의 우두머리라는데 별 수 있습니까.”
“이해해 줘서 고마워, 책사.”
“…고마우면 해결이나 빨리하고 돌아오십쇼. 일이 늦어지면 이 어마어마한 양의 일들을 홀로 독박 쓰게 생겼으니, 만약 그렇게 된다면 업무과중죄로 옥에 처넣어 감금해 버릴 겁니다.”
“그런 일 없게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
“예. 시간 재고 있을 거니 그렇게 아십쇼.”
“알겠다니까.”
그제야 책사는 살짝 안도한 것인지 계속 굳어있었던 표정을 조금 풀어 보였다.
그들의 대화를 끝으로 잠시 적막이 흐르며 시가가 머금고 있던 작은 불빛이 꺼져, 암흑만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곧이어 달빛이 열린 창문으로 들어와 그 안을 비췄으나 남자의 황금색 눈만큼 빛나진 못했다.
고요한 전투의 시작이었다.
*
“힐데!”
밝고 우렁찬 목소리가 자신을 부르는 것을 들은 남자는 걸음을 멈췄다. 이윽고 그 목소리의 주인을 마주하자 놀람을 금치 못했다. 집에 머무르고 있어야 할 이가 현재 자신과 함께 기차역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미? 아미가 왜 여기 있습니까?”
“섭섭하게 무슨 소리야! 힐데가 갑자기 오디션을 나가겠다고 했다는 걸 예현 오빠한테 들었다구. 근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엉?”
“아미라면 듣자마자 따라온다고 할 거 같아서 예현한테만 얘기해 둔 건데….”
힐데는 다소 난처하다는 듯 목덜미를 쓸었다. 그 모습에 자신을 돌려보낼까 걱정이 되었는지 아미는 황급히 말을 꺼냈다.
“방해 안 하고 옆에 꼭 붙어 있을겡! 매니저라고 생각하면 좀 나으려나?”
전혀 나은 것 같지 않은데요 아미…
생각을 애써 저 멀리 깊은 곳에 묻은 그는 잠시 침음한 후 말했다.
“그럼 꼭 같이 움직이는 겁니다 아미. 자칫하다 아미를 잃어버리면 전 윤에게 무조건 죽을걸요….”
“에이, 힐데도 참! 나도 어엿한 고등학생이라구!”
“그렇죠…, 네, 참 안심되네요….”
“그칭? 그럼 이제 기차 타러 가자!”
그러곤 자신보다 먼저 앞서서 총총거리며 뛰어다니는 아미를 보자 힐데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경위는 바로 이렇다.
책사와의 대화 이후 며칠 뒤 새벽, 힐데는 또라이들이 잔뜩 모여있다는 곳으로부터 동태를 살피기 좋은 인적 드문 장소로 향했다. 그리고 이전에 했던 한 거래를 통해 받은 육감을 감지할 수 없게 만드는 약물을 자신에게 투약하고 이런저런 상처를 낸 뒤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자신의 계획대로 처음 보는 집에서 눈을 떠, 기억을 읽은 척하며 그곳에서 잠시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다. 우선 그 집엔 삶의 빛과 소금인 소녀와 매우 온화하며 상냥한 소년이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최아미’와 ‘이예현’이라는 이름을 가진, 볼수록 커다란 따스함을 품은 이들을 이 상황에 말려들게 했다는 그 사실은 힐데의 양심을 찌르기 무척이나 충분했다.
그다음으로, 그 집에 소시오패스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는 ‘최 윤’이라는 이름으로, 아미의 친오빠라고 하였다. 윤은 관찰력과 두뇌가 좋은 듯해 보였는데 그래서인지 나를 굉장히 미심쩍어했다. 결국 켕기는 것이 많은 나는 또 한 번 양심에 찔리고 마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안 되겠다 싶었던 나는 한 오디션에 참가해 동네방네 나의 존재를 알려 일을 빨리 해치울 셈이었다. 시간을 지체할 순 없으니 말이다. 만일 책사가 이 사실을 알면 불같이 화를 냈겠지. 하지만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상황을 그쪽에선 인지하고 있는 분위기였는데 아직 접촉이 없었던 터라 놓은 강수였다.
그래서 어찌 되었든 간에 일을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는데… 아까의 사태가 벌어지고 만 것이다. 어느새 우리는 기차를 타 오디션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창문 너머의 풍경을 계속 구경하던 아미는 자신이 마침 삶은 달걀을 싸 왔다며 같이 먹자고 권했다. 나는 당연히 수락했다.
그렇게 달걀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우리의 앞 좌석에 앉은 한 여성이 나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기억이 없는 건가? 미카엘?”
미카엘.
나의 또 다른 지칭이었다.
“아…, 예?”
순간 표정이 흐트러질 뻔했지만 어떻게든 유지했다. 이렇게 갑자기 접근해 올 줄은 몰랐는데.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며 나의 별명을 부른 그 여자를 자세히 관찰했다.
그녀의 외양을 들여다볼수록 낯설지 않았다. 여우 같은 기다란 눈매와 오뚝 솟은 코. 그리고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몸에 밴 짙은 향수 냄새. 아 기억이 날 거 같은데.
기억을 되짚어보고 있는 사이에 아미가 내게 말을 걸었다.
“힐데, 혹시 아는 사람이야?”
나는 누구인지 점차 알 것 같았지만 반박했다.
“아뇨…. 저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여자는 우리의 대화를 즐겁게 바라보며 쿡쿡 웃어댔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손을 휙 들더니 내 얼굴에 가져다 대는 것이 아닌가. 나는 순간 반사적으로 그 손을 잡아 제압할 뻔했지만, 충동을 누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옆을 슬쩍 바라보니 아미는 진심으로 놀란 표정이었다. 내가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놀란 채 요지부동이자 여자는 이내 시시해졌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몸을 일으켰다.
“헛소문일 줄 알았는데~ 또 보자고? 힐데베르트.”
그러곤 유유히 사라졌다.
…콜튼의 수족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낼 줄이야. 분명 이름이 재연이었지. 늘 모습을 바꾸어대는 탓에 알아차리는 데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모습을 바꾸더라도 늘 유지되는 저 눈매와 코는 여자가 분명 재연이라는 사실을 어김없이 상기시켰다. 콜튼이라는 원로와 그의 수족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아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것을 보곤 이번에야말로 깜짝 놀랐다.
“아,아미! 괜찮아요?”
“힐데…. 너야말로 괜찮아?! 저 여자는 누구길래 저렇게 무례한 거야! 도시 사람들은 다 저래?”
“진…진정해요, 아미.”
“내가 진정하게 생겼엉!? 힐데는 왜 그렇게 태연한 거야!”
겨우 아미를 진정시켜 재우곤 다시 오디션장으로 향하는 길. 나는 아까의 일을 되짚어보며 앞으로 벌어질 수도 있는 일들을 예측하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자신이 노리고 있는 그들 또한 내게 접근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 사실이 퍽 흡족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 탓에 이들에게 안 좋은 영향이 갈까 우려스럽기도 했다.
앞으로 오디션장까지 대략 30분. 쉭쉭 빠르게 지나가는 바깥 속 풍경은 잘 보이지 않았음에도 무척이나 평화로워 보였다. 그러다 햇빛이 곤히 자는 아미에게 너무 눈이 부실 것 같아 커튼을 조심스레 쳤다. 기차는 무척 이지 고요했다.
그러다 홀로 나지막이 생각했다.
이번 전투가 내게 어떠한 영향을 줄지도 모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