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 미국을 믿었습니다."
어둡고, 매캐한 공간이었다. 다양한 라벨의 위스키가 장식장에 진열되어 있고, 창문은 블라인드로 햇빛을 차단해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도록 한.
그곳에서 미약한 빛을 내뿜는 작은 백열등이 푸른 눈과 금발을 불태우고 있었다.
물론, 새하얀 백발까지도.
"미국은 날 부자로 만들었죠."
남자는 그에게 무언가를 호소하고 있었다.
흰자위가 빨갛게 물들어있는 남자는 그가 백발의 사내 앞에서 얼마만큼 감정을 가라앉히려 노력하고 있는지를 뻔히 보여주었다. 남자는 두 손을 깍지 껴 잡아선 테이블 아래 감추고 있었다. 손가락 끝이 손등을 파고들었다.
"딸애도 미국식으로 키웠죠. 자유분방하게 키웠지만 가문의 이름은 더럽히지 말라 가르쳤습니다. 이탈리아인이 아닌 남자 친구를 만나고, 영화를 보러 갔다가 밤늦게 돌아와도 뭐라 안 했었죠."
남자는 마치 떠올리고 싶지 않은 끔찍한 과거를 떠올리는 피해자처럼 눈을 감고 말했다.
"두 달 전 그 애는 다른 놈과 셋이서 드라이브를 갔습니다. 놈들은 딸에게 위스키를 먹이곤 강간하려 들었죠."
목소리가 떨렸고,
"그 애는 저항했어요. 명예를 지킨 거죠."
그것은 곧 분노할 듯이 으르렁거리기도 했다.
"그러자 놈들은 짐승처럼 그 애를 때렸습니다."
하지만 곧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백발의 사내를 눈에 담았다.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은 샛노란 눈동자가 뱀처럼 보였다. 남자는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경청해 주었다. 비스듬히 의자에 기대어 앉아 털이 긴 장모 고양이를 툭툭 쓰다듬으며.
금발을 매끈하게 넘긴 남자는 돌연 눈가에 이채를 떨구며 말했다.
"병원에 가보니 애는 코가 부러지고, 턱은 으스러져 철사로 고정해 뒀더군요. 내 딸은 고통 때문에 울지도 못했어요. ⋯난 울었습니다."
순식간에 눈물을 훔쳐낸 이는 앞에 놓인 버번위스키가 담긴 자그마한 스트레이트잔을 집어 들어선 독한 내용물을 한입에 털어 넣곤 마저 이야기했다.
"왜 그랬겠습니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물론 그도 대답을 바라지 않았다는 듯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위스키잔을 도로 자리에 내려놓으며 진한 알코올 향을 길게 뱉은 뒤에.
"⋯⋯그 애는 내 빛이었기 때문이죠. 아주 아름다운 아이였는데 이제 그 아름다움을 영영 잃었죠."
이야기를 이어가면서 푹 조아린 정수리에는 간절함이 묻어나기도 했다.
"난 미국인이라면 응당 그렇듯 경찰을 찾았어요. 놈들은 재판을 받았는데 판사는 3년 형을 내리고 집행 유예로 풀어줬어요."
다시금 깍지 껴 잡은 두 손이 희게 질렸다. 떠올린 것을 다스릴 수 없을 정도로, 온몸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부들부들 그의 몸이 떨렸다. 이윽고 분노를 숨기지 못한 남자는 고개를 조아린 그대로 왈칵 소리쳤다.
"집행 유예라니!"
거칠게 몰아쉬는 숨 뒤로, 남자는 죄송하다는 말을 뱉었다. 이 자리가 그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는 태도였다. 남자는 숨을 고루 쉬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금안은 시종일관 냉랭하기만 했다.
"바로 그날 자유의 몸이 된 거죠."
남자는 허리를 곧게 펴 앉으며 이를 갈며 말했다.
"난 법정에 멍하게 서 있었고, 그 개자식들은 날 비웃었죠. 그때 난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돈께서 복수해 주실 거라고."
그의 이야기를 한참 듣고 있던 남자는 시선을 내렸다. 제 머리카락처럼 하얀 고양이는 남자의 허벅지에 배를 까고 누워선 야옹야옹 울었다. 그의 손을 장난감 삼아 장난을 치는 것이 퍽 이 공간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었다.
남자는 고양이의 턱을 긁어주면서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리곤 아주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내게 먼저 안 오고 경찰부터 찾았지?"
"원하는 건 뭐든 드릴 테니 제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뭘 원하지?"
그의 질문에 남자는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놈들을 죽여 주십시오."
"그건 안 되겠군."
"뭐든 드리겠습니다."
"우린 알고 지낸 지 꽤 됐지. 하지만 내게 도움을 청하러 온 건 이번이 처음이야. 그대가 내게 커피를 대접한 게 언제인지도 까마득하군."
그러면서 남자는 눈썹을 휘었다. 대단히 유감이라는 듯 고양이를 쓰다듬던 손을 멈추기도 했다. 그러면서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이복누이를 떠올렸다.
"내 누이가 자네 외동딸의 대모인데도."
남자는 그 순간부터 얼굴에 핏기가 빠져나가는 듯 보였다. 백발의 사내는 어깨를 으쓱였다. 비릿하게 걸쳐지는 입가의 미소가 의미하는 것은 분명 아무것도 아닐 텐데도 남자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솔직해지자고. 나와의 우정을 원치 않았잖나? 내게 빚을 지기 싫었던 거지."
"말썽에 휘말릴까 봐 그랬습니다."
"이해해. 미국에서 낙원을 찾았고, 사업도 순조롭고, 돈벌이도 잘 되는 데다 그대를 수호할 경찰과 법도 있으니 나 같은 친구는 필요 없었을 거야."
금안은 비릿하게 웃음을 지으며 온더락잔을 들었다.
버번위스키를 한 모금 들이킨 뒤 잔 끝에 시선을 내렸다. 고양이는 여전히 야옹야옹 울었다. 남자가 쓰다듬어 주는 손길이 멈춘 후부터는 그의 손에 헤드번팅을 하다가 허벅지 위에서 두어 바퀴 돌곤 자리를 잡으며 그르릉 소릴 내었다.
달그락.
아름답게 세공된 크리스털 온더락잔이 철제 쟁반에 내려놓아진다.
그의 주변을 지키던 눈 밑이 짙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흑발의 남자가 위스키를 채워주었다. 금안이 그를 올려다보며 눈짓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 그리곤 눈알을 굴려 남자를 바라본다.
"그런데 이제 와 나를 찾아와 정의를 구현해 달라니."
살풋 웃으며 자조하는 남자.
"존경심이 묻어나질 않는군. 우정도 담겨있지 않고. 대부님이라고 부르지조차도 않으면서 내 대녀의 결혼식 날, 내 집에 쳐들어와 돈을 주겠다며 살인 청부라니."
"정의를 구하는 겁니다."
"정의? 그대 딸은 살아있지 않던가?"
"그럼 그 애가 당한 만큼의 고통을 되돌려 주십시오."
금발의 남자는 포기라는 것을 모르는 눈치였다. 부러 그가 약을 올려도 결국은 복수를 원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얼마면 되겠습니까?"
"하."
남자의 금안이 반짝였다. 아주 잠깐의 분노는 곧장 사그라들었다. 남자는 제 위에서 잠든 고양이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며 자리를 일어섰다.
고양이는 놀란 듯 일어나 그의 품에서 뛰어내려 도도히 사라졌다.
그는 고양이의 뒤꽁무니를 보면서 부드럽게 웃다가, 창가로 향했다. 창문을 모조리 가린 블라인드를 들추자, 정오의 햇살이 눈부시게 새어 들어왔다. 그의 백발과 구릿빛 피부가 햇살에 반짝였다. 금안은 마치 황금처럼 빛을 발한다.
창문 너머에서는 남자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대녀의 결혼식 풍경이 한창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모여 인사를 나누고, 악단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아이들은 뛰어놀았다. 다양한 꽃장식과 풍선들로 그의 저택 마당을 아름답게 꾸며두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그의 대녀.
남자는 블라인드를 들추고 있던 손을 내렸다.
다시금 암흑이 찾아왔다.
남자의 금안은 마치 야광석처럼 어둠 속 광원이 되어 반짝였다. 남자는 창문을 등지며 돌아섰다.
"이봐. 트베인⋯. 이 친구야."
허리까지 오는 하얀 백발이 어깨너머로 흘러내렸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금발의 남자, 제이슨 트베인의 앞에 서는 남자. 제이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맞은편에 마주 섰다.
"내가 어떻게 했기에 그리 불경하지? 그대가 내 친구로 왔다면 놈들은 마땅한 죗값을 치렀을 거야. 그대처럼 정직한 자에게 적이 있다면 그것은 곧 내 적이기도 하니까."
그는 제이슨의 퍽 결연한 얼굴을 보며 이야기했다.
"그댄 경외의 대상이 됐겠지."
남자의 말을 이해한 듯, 남자는 그의 오른손을 잡아선 제 명치 높이까지 들어 올린다.
"⋯친구가 돼주십시오. 대부님."
허리를 숙인 뒤에는 그렇게 말했다.
그의 손등에 경외와 존경의 마음을 담아 키스하기도 했다. 남자는 그제야 만족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좋군."
제이슨이 허리를 폈다.
입가에 걸린 기대에 가득한 미소.
"그런 날이 안 올 수도 있지만 언젠가 부탁을 할 수 있겠지. 그때가 오면 이 복수를 내 대녀의 결혼식에 와준 답례라고 생각해 주게."
"감사합니다. 대부님."
"그래."
제이슨은 벗어둔 자신의 페도라를 챙겨 들며 꾸벅 인사를 한 뒤, 문을 여는 또 다른 남자의 안내를 받으며 빛 속으로 사라졌다.
달칵.
빛은 다시 사라졌다.
문을 닫은 남자를 향해 금안이 굴렀다.
마치 개구쟁이 막내아들을 상대했다는 것처럼 눈썹을 휘며 웃은 남자는 피부가 하얀 흑발의 남자에게 조용히 지시했다.
"이고르에게 일을 맡겨. 감정에 휩쓸리지 않을 자가 필요해. 저 장의사가 뭐라건 우린 살인자가 아니니까."
***
햇살은 지독히도 따사로워서 결혼식을 하기에는 최적의 날임을 알려주었다.
결혼식의 주인공은 앳된 인상의 동양인 여성이었다.
키가 작고 아담한 체구였지만 그것을 보완해 줄 꽃 자수가 새겨진 원단을 프릴로 마감한 엠파이어 웨딩드레스는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다.
"결혼 축하해요, 아미. 드레스가 너무 예뻐요."
"고마워요. 소피아."
"아미! 아미, 저예요. 나나! 결혼 축하드려요!"
"나나! 와줬구나! 정말 고마워, 바빴을 텐데."
그녀는 저마다 제게 결혼을 축하하는 말로 축복해 주는 이들에 대답해 주며 손을 잡고 악수를 하거나 꼭 끌어안아 비쥬를 하기도 하며 정원의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사진 촬영을 위해 모여있는 가족들에게 당도했을 적에는 그녀의 양 볼이 발그랗게 상기된 상태였다. 아미는 연분홍빛이 도는 하젤 장미 부케를 손에 꼭 쥔 채 저를 맞이해주는 신랑의 곁에 섰다.
"대부님은?"
"아직. 화장실이 오래 걸리시나 봐."
그녀는 제 짝과 귓속말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꺄르르 웃어댔다. 그러면서 저택을 나서고 있는 백발의 남성에게 부케를 든 손을 번쩍 들어 올려 흔들며 외쳤다.
"힐데! 여기예요, 대부님!"
아미의 부름을 들은 힐데베르트는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걸면서 그들에게로 향했다. 햇살이 그의 새하얀 머리카락에 깨져 빛으로 산란했다. 평소와 달리 검은 양복을 찾아 입은 덕에 그의 백발이 유독 더 눈에 띄는 듯 보였다.
그는 자신의 대녀에게서 사랑스러움을 느끼면서 가족사진을 찍기 위해 모인 가족들이 건네오는 인사를 받아주었다.
붉은 머리의 이복누이는 자신의 옆에 서라며 그를 끌어당기기도 했다. 패밀리의 첫 아이인 갈색 머리 사내아이는 그가 제 뒤에 서주기를 간청했다. 그것들을 들어주면서 자리를 잡던 힐데베르트는 사진사가 셔터를 누르기 전 주변을 둘러보다 제 뒤에 서 있는, 저택에서 제이슨 트베인에게 문을 열어주었던 이에게 물었다.
"리카르도는 어디에 있지?"
"걱정 마세요. 곧 올 겁니다."
"아니. 릭이 없으면 사진은 찍지 않아."
그렇게 말한 뒤 자리를 떠나버리는 힐데베르트.
제 여동생의 곁에 서 있던 남자는 흑발의 남자에게로 몸을 기울이며 나직이 물었다.
"왜?"
"리카르도 때문에."
***
"피곤해 보이네, 예현."
힐데베르트는 작은 응접실에서 그렇게 말했다.
일전의 피부가 하얀 흑발의 동양인이었다. 그는 힐데베르트의 맞은편에 앉아 크기가 적당한 서류 가방과 함께 얼마 전 결혼을 한 형제의 친오빠와 함께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예현은 잠시 느른히 앉아 있던 몸을 일으키며 허리를 곧게 펴 앉아선 후 말했다.
"아닙니다. 비행기에서 눈 좀 붙였습니다."
그리곤 곧장 서류 가방에서 겉면이 흑갈색인 서류봉투를 꺼내 들었다. 서류는 원형 테이블 위에 차곡차곡 올려졌다.
“션튼 휜도블러 자료를 가져왔어요. 놈의 별명은 '터키인'이라던 것 같아요. 칼을 다루는 솜씨는 비상하지만, 사업에 차질이 생길 때만 발휘한다고 하고요.”
힐데베르트는 그가 가져온 이야기를 경청해 주었다.
"그 사업은 바로 마약입니다. 그는 터키에 땅이 있고, 그곳에서 양귀비를 재배하면 시칠리아의 공장에서 헤로인으로 가공하죠. 그의 제안은 현금과 경찰을 공조하는 대가로 수익의 일부를 준다는 건데⋯."
한 장 한 장 서류들을 테이블 위에 펼치며 이야기하던 예현은 잠시 이야기를 멈추었다. 눈알을 들어 올려 패밀리의 수장을 한 번 흘끗거리곤 더없이 곤란하단 표정을 짓다가 첨언했다.
"정확한 금액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 말에 힐데베르트는 제 옆에 놓인 블랙 라벨의 위스키를 스트레이트잔에 따라 마셨다. 눈썹 위를 긁적이는 작은 행동 하나에도 예현은 마치 가시방석 위에 앉아 있는 것 같단 기분을 느꼈다.
자그마한 침음성 하나 흘리지 않는 그의 심기를 눈치 보던 예현은 곧 또 다른 정보를 하나 이야기해 주었다.
"다만, 뉴욕에서 와이즈만 패밀리가 후원한다는데 그들도 분명 얻는 게 있을 겁니다."
백발의 남자는 스트레이트잔을 내려놓은 뒤 턱짓하며 물었다.
"전과 기록은?"
"이탈리에서 한 번, 이곳에서 한 번입니다."
그의 이야기에 힐데베르트는 소파의 팔걸이에 걸쳐둔 왼손으로 턱 끝을 쓸었다. 이 사업에 대한 고민이 짙음을 분명히 해주는 제스쳐였다.
예현은 잠시 허리를 숙이기 위해 엉덩이를 들썩였다.
"마약 쪽에선 최고랍니다."
"⋯⋯윤. 네 생각은 어떻지?"
냉철하게 빛나는 금안이 예현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로 굴렀다.
그는 예현과 마찬가지로 동양인이면서 동시에 힐데베르트의 대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줄곧 표정 없는 얼굴로 예현의 이야기를 경청했더랬다. 그러한 점이 꼭 힐데베르트를 닮아 주변에서는 그를 '돈의 아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어찌 됐든 윤은 예현의 이야기가 본론으로 들어갈 적부터 답을 정해두었단 양 곧장 대답했다.
"돈 되는 사업이죠."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명료하게 떨어지는 대답.
힐데베르트의 눈썹이 으쓱였다. 그리고 다시금 예현에게로 굴러가는 금안.
"예현, 넌?"
"동의합니다. 할만한 사업 중 마약만큼 수익이 잘 나는 건 없으니까요.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다른 누군가가 뛰어들 겁니다."
"흠⋯⋯."
제법 강경하게 나오는 예현의 태도에 힐데베르트는 다시금 고민에 빠지는 듯 보였다.
제 앞에 앉아 있는 남성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부류였다면 아마 이 정도로 고민하진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힐데베르트에게 윤과 예현은 그들이 갓난아기였거나 초등학생일 시절, 자처해 그들의 울타리가 되겠노라 선언했을 만큼 귀히 여기는 소중한 대자들이었다.
예현은 은퇴한 제 아버지의 뒤를 따라 패밀리의 전담 변호사이자 조언자 역할인 콘실리에레(Consigliere)로서 능력을 보여주었고, 윤은 당시 두 살배기 여동생과 함께 그에게 거둬진 후 비상한 두뇌를 인정받아 성년이 되기도 전에 직접 패밀리의 언더보스(Under Boss)로 지명했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들은 오늘까지도 가문의 수장인 그에게 좋은 동료이자 빼어난 수하였고, 그렇기에 그는 오래 고민했다.
힐데베르트 탈레브가 탈레브 패밀리에서 누구보다 믿고 따를 수 있는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는 것은 꽤 보기 드문 경우라는 것이 이유였다.
윤과 예현은 같은 동양인이라는 점에서 죽이 잘 맞고, 사이는 좋았지만 공적인 일에 있어서는 각자의 견해가 달라 자주 충돌을 일으키는 사이이기도 했다.
그런 두 사람이 입을 모아 사업을 추진하자 한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힐데베르트는 더없이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러나 힐데베르트가 그들을 오래 봐온 만큼 두 사람도 그의 성정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예현은 조금 강수를 두기로 다짐했다.
"다섯 가문이 전부 달려들 사업입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경찰과 정치인들을 포섭할 테고, 그들은 우릴 노릴 겁니다."
그 말에 힐데베르트의 눈썹이 까딱였다.
반응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예현은 쐐기를 박았다.
"지금은 노조와 도박장 운영으로도 충분하지만, 마약은 떠오르는 사업입니다. 지금 발 담그지 않으면 수중의 모든 걸 잃을 수 있어요. 지금은 아니더라도 10년 후에는 얘기가 달라질 겁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윤과 예현의 각기 다른 흑안이 금안을 향했다.
/
"돈 탈레브."
페도라를 깊게 눌러쓴 남자는 맞은편 자리에 앉는 힐데베르트를 향해 인사했다.
제가 앉은 자리에서 엉덩이 한 번 띄우지 않고서 말이다.
"난 힘 있는 자들을 친구로 둔 이와 현금 100만 달러 그리고 정치계 연줄들을 원합니다. 당신은 한둘이 아니라던데요."
그는 션튼 휜도블러였다.
휜도블러는 양손을 쫙 펼쳐선 손가락 끝을 맞대어 꾹꾹 눌러대며 이야기했다. 실로 거만하기 짝이 없는 태도에 자리를 함께한 어깨 기장의 흑발을 가진 남자는 이따금 감정이 상하는 듯 보였다.
반면 힐데베르트는 개의치 않아 했다. 오히려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 준 그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혹여라도 온갖 미사여구를 갖다 붙여 자신을 찬양하는 말 따위를 뱉기라도 했다면 사업에 대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을 텐데.
그는 꼭 힐데베르트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굴었다.
"우리 가문의 지분은?"
힐데베르트는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걸친 채 물었다.
"30%."
남자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첨언했다.
"첫해엔 300만 달러에서 400만 달러. 나중엔 더 올라갑니다."
"와이즈만 가문은 뭘 얻지?"
"⋯과연 대단하시군요."
정곡을 찔리기라도 했다는 것인지, 휜도블러의 입가에 오묘한 미소가 걸렸다.
"그건 제 몫에서 해결하도록 하죠."
휜도블러는 느른히 앉아 있던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고, 반대로 힐데베르트는 비스듬히 몸을 젖히며 말했다.
"그대의 제안은 수익의 30%를 줄 테니 자금과 정치인, 법조인의 도움을 제공해 달라는 거지?"
"그렇습니다."
"재밌군. 왜 내게 왔지? 내가 뭐 그리 대단한 인물이라고."
타다닥. 타다닥.
두 사람 사이에 놓인 나무 테이블을 두드리는 구릿빛의 손가락 끝에서는 그러한 소리가 균일하게 들렸다.
그러자 휜도블러는 자조하듯 웃으며 대답했다.
"현금으로 100만 달러를 자금으로 대줄 사람이 있다면 당신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하하."
힐데베르트는 남자의 대답에, 표정에, 태도에 그렇게 웃어 보였다. 테이블을 두드리던 손을 들어 올리며 마치 벌레를 쫓아내듯 손목을 휘두르기도 했다.
휜도블러도 그를 따라 하하하 웃었다.
드르륵.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들리고, 곧 백발의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 오른쪽 대각선 뒤편에 마련된 작은 허리 높이의 테이블로 걸음을 옮긴 그는 손잡이가 짧고 뭉툭한 꼬냑잔에 적포도주를 따르며 말했다.
"난 그대가 아주 진중하고 존중받을 만한 친구라기에 만나겠다고 한 거였어."
잔의 ⅔가 채워지고서야 그는 와인병을 내려놓고 한 손에 잔을 들었다. 그리곤 남자의 바로 옆자리에 놓인 의자 팔걸이에 엉덩이를 걸쳐 앉았다.
자연스럽게 저를 올려다보게끔 하는 위치였다.
힐데베르트는 와인을 한 모금 가볍게 음미한 뒤,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툭툭 그를 쳤다.
"하지만 거절할 수밖에 없겠군."
그리곤 코웃음을 친 힐데베르트는 다시금 와인을 삼켰다. 보울의 크기가 작은 꼬냑잔은 금세 비워졌다.
그의 형형한 금색 눈이 휜도블러를 향했다.
"이유를 말해주지. 정계에 친구들이 많은 건 사실이네. 하지만 도박 대신 마약 사업을 하게 되면 그들은 더는 친구로 남지 않겠지. 도박엔 별 신경 안 써도 마약은 더러운 장사니까."
"돈⋯⋯."
"먹고 살려고 무슨 짓을 하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하지만 그대 사업은 좀 위험하군."
"대금을 못 받을까 봐 걱정하시는 거라면 와이즈만 가문이 있습니다."
그 말에 힐데베르트의 옆 의자에 앉아 있던 흑발의 남자가 발끈해 말했다.
"놈들을 믿고 투자하라?"
"조용."
힐데베르트는 곧장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입을 다물고 앞으로 쏟아져 나왔던 몸을 뒤로 물리는 남자와 표정을 지워버린 힐데베르트는 구부정했던 몸을 바르게 하며 사과했다.
"아이들에겐 마음이 약해서 이렇게 버릇없이 키웠어. 들어야 할 때 떠들지."
남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를 보며 힐데베르트는 다시금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어찌 됐든 휜도블러. 난 거절하겠네. 다만, 새 사업을 앞둔 그대를 축하해 주고 싶군. 잘하리라 믿어. 무운을 빌지. 이해관계가 나와 겹치지 않아 고맙고."
말을 마친 힐데베르트는 꼬냑잔을 높이가 낮은 유리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연스레 허리가 굽혀진 그의 기다란 백발이 어깨를 넘어 흘러내렸다.
휜도블러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힐데베르트가 식솔들을 데리고 장소를 벗어날 때에서야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배웅할 뿐이었다.
"요우. 이리로."
접견 장소에서 나온 힐데베르트는 그들과의 거리가 충분히 멀어진 뒤에서야 앞장서 걷던 이를 불렀다. 휜도블러에게 불만을 표출했던 남자였다.
그는 힐데베르트의 앞에 섰다.
고개를 숙여 시선을 낮춘 그에게 금안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 나름 아끼는 이를 훈계할 때 나오는 태도였다.
"왜 그랬지? 똑똑한 아이였는데⋯. 식구 외의 이들에게 네 생각을 발설하지 마라."
"예."
"가봐."
남들이 보기에 허무할 정도긴 했지만.
그는 요우의 팔뚝을 툭툭 쳐주며 그를 보냈다.
요우는 힐데베르트에게 고개인사를 한 뒤 돌아섰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인 힐데베르트는 코로 숨을 깊게 내쉰 뒤 바로 지척에 서 있는 예현에게로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의 부름에 예현이 그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와 섰다.
"예현, 트래버를 불러와."
예현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명령한 힐데베르트는 꾸벅 허리 숙여 저를 마중하는 이를 두고 요우가 걸었던 길을 따라 건물을 나섰다.
곧 다가올 성탄절에 대비한 구세군의 종소리가 들렸다.
***
"션튼 휜도블러라는 친구가 걱정돼."
응접실 소파에 느른히 몸을 기대어 앉은 힐데베르트는 손가락 사이에 처칠 시가(Churchill Cigar)를 태우며 어두운 조명 아래 앉아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수염이 덥수룩하고 체구가 큰 남자가 앉아 있었다.
예현에게 지시해 불러들인 그의 추종자, 트래버였다.
"그의 속셈이 뭔지 놈의 뒤를 캐봐."
샛노란 금안은 천천히 눈꺼풀에 가려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시가를 깊이 빨아들인 그는 숨을 길게 뱉어내며 이야기했다.
트래버는 자신을 불러 쓰임을 증명할 만한 기회를 준 그에게 감격한 눈치였다. 동시에 결연한 얼굴로 그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와이즈만 패밀리에 가서 우리 가문에 불만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하늘하늘 잿빛 연기가 허공에 퍼졌다. 힐데베르트는 재떨이에 재를 털며 남자의 안색을 살폈다. 트래버는 퍽 경건하기까지 해서 그의 입가에는 길쭉하고 부드러운 미소가 살그머니 걸쳐지기도 했다.
"정보를 캐내 와."
/
"트래버. 내 소개를 하지. 재연 와이즈만이라 하네. 길거리 부랑자에서 과분하게 돈의 성을 받은 양자지."
"압니다."
"음."
여우 같은 눈매를 가진 이국적인 남자였다. 동양인도 서양인도 아닌, 국적을 유추하기 어려운 남자. 남자는 브랜디잔에 술을 따라 마시며 눈썹을 으쓱였다. 싸르르하고 뜨거운 술은 식도를 따라 꿀꺽 넘어갔다.
재연과 트래버의 사이에는 당구대처럼 보이는 얄쌍한 포커 테이블이 놓여있었다. 와이즈만 패밀리의 식솔들이 가볍게 갬블을 할 수 있는 장소였다.
"전쟁 전 스카치인데, 들겠어?"
"전 술을 안 합니다."
"아쉬운걸."
술병을 건네던 손을 거두며 재연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곤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나선 그것을 선반에 도로 돌려놓았다. 그사이 션튼 휜도블러는 트래버를 향해 말을 붙였다.
"내가 누군지 아나?"
"알죠."
"와이즈만 가문에 연락했다지?"
트래버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함께 사업을 해도 좋을 것 같은데. 당신같이 강한 사람이 필요해. 탈레브 가문에 불만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같이 일해보겠나?"
"나한테 뭐가 떨어집니까?"
"선금으로 5만 달러."
휜도블러의 제안에 흔들리기라도 한 것인 양 연기하는 트래버는 잠시 망설이다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좋군요."
"수락한다는 뜻이지?"
비릿하게 웃는 션튼 휜도블러는 손을 내밀었다.
포커 테이블에 손을 올리고 있던 트래버의 왼손등을 어느새 다가온 재연이 툭툭 쓰다듬어 주었고, 트래버는 오른손으로 휜도블러와 악수를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콰앙!
"아아아악!"
트래버의 손등을 쓰다듬던 재연의 눈빛이 돌변했다.
그는 반대 손에 숨겨둔 잭나이프로 트래버의 손과 포커 테이블을 같이 찔러 박아버렸다. 칼날이 박힌 손에서는 피가 흐르지 못했다. 맹렬한 통증만이 트래버를 몸부림치게 했다.
고통에 소리치던 트래버의 뒤에서는 숨어있던 와이즈만 패밀리의 일원이 와이어를 들고 재빠르게 그의 목을 졸라 뒤로 젖혔다.
"끅, 끄를⋯! 으흐흐! 끅⋯, 흑⋯ 끅⋯⋯."
발버둥을 치며 벗어나려 할수록 와이어는 그의 목살을 파고들 뿐이었다. 오래지 않아 숨을 쉬지도, 벗어나지도 못한 트래버는 결국 그들의 손에 절명했다.
주르륵 주저앉은 그를 보면서 재연은 쑤셔 박았던 잭나이프를 빼 들었다. 그러면서 얼굴에 튄 몇 방울의 피를 손등으로 훔치며 무릎 꿇은 채 사망한 트래버의 동그란 머리통을 내려보았다.
션튼 휜도블러는 사망한 트래버를 보며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치다가 손에 들린 온더락잔에 스카치를 따라 마셨다.
***
"기다려라, 과일 좀 사 올 테니."
힐데베르트는 윤과 함께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다. 길가에 세워둔 차에 타기 전 그는 제 대자를 향해 그리 말했다.
"예."
윤은 짧게 대답을 한 뒤, 차에 타 대기를 했다.
그 사이 힐데베르트는 바로 건너편의 과일 가게로 건너갔다. 그리 멀지 않았다. 열 걸음이면 당도할 만큼 도로는 좁았다.
"메리 크리스마스."
힐데베르트는 과일 가게 사장에게 인사했다.
"과일 좀 사려는데 이거 세 개랑 이것도⋯."
과일 가게 사장은 힐데베르트가 고르는 과일을 열심히 봉투에 담았다. 다른 과일들을 둘러보기 위해 힐데베르트가 고개를 돌리던 그때였다.
성탄절을 대비해 인산인해를 이루는 인파 속에서 페도라를 눌러쓴 검은 양복 차림의 남자들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며 차로 향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 순간 힐데베르트는 전신의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안 돼⋯. 안 돼, 윤!"
탕―!
첫 총성이 들리자 거리는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그것은 힐데베르트의 왼쪽 어깨에 처박혔다.
타당탕! 타앙!
"꺄아아아악!"
다급하게 차로 달려간 힐데베르트는 그들이 쏜 총알을 모조리 맞아야 했다. 그로 인해 그의 허리, 등, 오른팔 팔꿈치에 틀어박힌 총알 중 팔꿈치를 관통한 총알만이 뒷좌석의 유리창을 깨고 차 안을 굴렀다.
힐데베르트는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운전석에 앉은 윤을 살폈다. 그는 무사해 보였다. 자신의 희생이 실패로 돌아가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소중한 대자가 저 때문에 적의 총에 피격당해 머리통이 터져 사망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그들의 목표가 저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제 식구들에게 한없이 마음 약한 그를 낚기 위한 교활함이 통한 것이었다.
차창 너머로 들리는 총격과 흐드러지며 창문에 처박히는 새하얀 백발을 보면서 윤은 핏기 없는 아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버지."
그리곤 서둘러 운전석 문을 박차고 나왔다.
그 사이 힐데베르트를 쏜 남자들은 일사불란하게 몸을 숨겼다. 윤은 그들을 쫓으려 하지 않았다. 다만, 힐데베르트가 여전히 자신을 살피고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고 있었다.
힐데베르트는 하반신에서 감각이 느껴지지 않음을 알았다. 그래도 다행이라 여겼고, 허리와 등이 지독히도 아팠다. 관통되지 못한 총알은 몸속에서도 뜨겁게 달궈진 그대로였으니.
팔꿈치 관절을 박살 낸 탓에 뒤틀린 오른팔도 정신을 놔버릴 만큼 고통스러웠다.
그럼에도 자신의 대자가 저로 인해 죽는 꼴을 보지 않았다. 그 사실이 다른 무엇보다 그를 안심시켰다. 미련하기 그지없는 생각이었다.
힐데베르트는 차의 후미로 몸이 기우는 것을 느끼며 까마득한 어둠으로 침잠했다.
―쿠웅.
묵직한 소리였다. 후두부가 지면과 충돌하는.
윤은 경악했다. 무릎을 꿇고 기듯이 다가가 힐데베르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후두부가 축축했다. 감정을 띠지 않던 그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일그러지는 얼굴 위로 후두둑 떨어지는 물줄기가 구릿빛 피부 위로 떨어졌다.
"대부님!!"
그의 비명이 거리에 울려 퍼졌다.
***
남자는 성탄절 선물을 구매했다.
이번에 결혼을 한 형제와 대부님에게 선물할 것들이었다.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아미에게는 스카프를, 힐데베르트에게는 품질 좋은 시가 한 상자를 선물할 요량이었으니.
거리는 무척이나 추웠다. 곧 눈이 내릴 것 같은 시림이 바람에 섞여 있었다. 얕게 분 바람에 앞머리가 휘날렸다.
한참 길을 걸으며 작은 노점을 지나쳤다. 신문과 몇몇 가지 생필품, 식품을 파는 노점이었다. 그곳을 지나치려다가 뒷걸음질해서 돌아왔다.
그의 녹안이 흔들렸다.
신문의 1면에 실린 기사 탓이었다.
[힐데베르트 탈레브 살해된 것으로 추정]
[암살자들에게 피격당한 암흑가의 우두머리]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신문의 내용을 필사적으로 속독했다.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생사 여부가 없어."
중얼거린 남자는 신문을 내려놓고 달렸다.
근처의 공중전화 부스를 찾기 위함이었다. 부스는 그리 오래지 않아 발견할 수 있었다. 다급하게 안으로 들어간 그는 다이얼을 돌렸다. 신호음은 길었다.
"씨발, 씨발, 씨발⋯."
남자는 병적으로 엄지손톱을 뜯으며 연신 욕설을 해댔다. 그리고 마침내 신호음이 끊겼다.
"윤, 나야."
그는 전화를 받은 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혔다. 수화기 너머로 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릭. 지금 어디지?]
제 나름 걱정과 안도가 섞인 질문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그의 질문을 되받아쳤다.
"아버지는?"
[아직 몰라. 온갖 추측들이 난무해.]
여전히 석연찮았으나 그제야 남자는 안도할 수 있었다. 그는 힐데베르트의 생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손톱을 뜯던 것을 멈춘 그가 주먹을 이마에 갖다 댄 손을 파르르 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듣고 있냐?]
"어, ⋯어어."
[대체 어디 있었지? 다들 네 걱정만 했어.]
남자는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예현에게 못 들었어?"
[그래. ⋯이럴 게 아니라 릭, 우선 집으로 와라. 델테이 대모님이 걱정하고 계신다.]
/
"네 보스는 죽었다."
휜도블러는 거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힘쓰는 부류가 아닌 거 아니까 걱정하지 마. 탈레브 일가를 도우면서 나를 도왔으면 해. 널 데려오고 한 시간 뒤 집무실 밖에서 습격받았거든."
위스키를 홀짝인 그는 어깨를 으쓱였고, 원 버튼 재킷 단추를 풀며 자리에 앉았다. 소파의 반 정도 걸쳐진 엉덩이. 휜도블러는 다리를 꼬았다. 그의 검은색 구두가 어둡고 눅눅한 공간에서 발하고 있는 랜턴 불빛에 반짝였다.
그리곤 잔을 든 손을 까딱이며 말했다.
"마셔."
코끝이 빨개진 예현이 그의 권유에 따라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앞에 놓인 온더락잔을 들었다. 위스키는 한 모금 양 만큼만 담겨있었으므로 예현은 그것을 한입에 털어 삼켰다.
그를 보면서 휜도블러는 만족스럽다는 듯 코웃음 쳤다.
"나와 윤의 관계는 이제 너에게 달려있어."
다시금 위스키를 삼킨 뒤에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진한 위스키의 향이 훅, 코끝을 자극했다.
"윤은 내 제안에 관심 있던 거 맞지? 너도 마찬가지였고."
"윤은 당신을 그냥 두지 않을 겁니다."
"처음에야 그러겠지. 그러니 네가 말을 잘 해줘야 해."
코끝만큼이나 붉은 흰자위로 보아 예현은 힐데베르트 피격 사건 직후의 일들을 모르는 눈치였다. 애초 납치를 당했다고 봐야 할 일이었다.
휜도블러는 온더락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두었다.
양손을 마주 잡아 깍지를 끼곤 꼰 다리를 까딱였다.
"와이즈만 가문이 전적으로 나를 후원 중이고, 뉴욕의 다른 가문들도 전면전을 막을 수만 있다면 웬만한 제안은 받아들일 거야."
비릿하게 웃으며 말하는 휜도블러.
"뭐, 보스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이미 한물갔었잖아."
예현은 텅 빈 눈을 하고서 휜도블러를 보았다.
저 좋을 대로 주둥이를 놀려대는 그를 두들겨 패고 싶었다. 적진의 한가운데에서 전투원도 아닌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지만.
"10년 전이라면 이럴 수 있었겠어? 어찌 됐든 탈레브는 더 이상 돌아오지 않아. 그러니 윤은 물론 간부들에게 전해. 카이로스나 이고르같은 놈 말이야."
그의 새까만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주먹에서는 피가 날 듯 힘이 들어갔다. 그의 흰 손을 가만 내려다보던 휜더블러는 싱긋 웃었다. 그리곤 품에서 담뱃갑을 꺼내 들어 탁탁 쳤다. 곽에서 튀어나오는 하얀 담배.
담배 한 개비를 앙 문 뒤에는 지포라이터를 이용해 불을 붙였다. 길게 삼킨 뒤, 길게 뱉었다. 희뿌연 연기가 예현의 코끝에까지 닿을 만큼 뻗어나갔다가 모습을 감췄다.
"좋은 사업이야, 예현."
"노력하겠지만 윤도 트래버를 꺾지 못할 겁니다."
그의 주장에 휜도블러는 몸을 뒤로 젖혔다.
가죽 소파에서 작은 소음이 들렸다.
휜도블러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대로 담배를 쥔 손가락 끝으로 관자를 긁적였다. 손이 움직이는 대로 담배 연기도 흔들렸다.
그는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삼키려 입술을 물었다가 표정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아⋯. 트래버는 내게 맡겨. 너는 윤만 설득하면 돼. 다른 형제들도."
"최선을 다해보죠."
"좋군."
휜도블러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럼 이만 가 봐."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수하가 안내하는 대로 이동하는 예현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난 폭력이 싫어, 예현. 이래 봬도 사업가라고. 피를 보면 결국 손해라는 말이지."
***
예현이 돌아오고, 이틀 뒤였다.
"이게 뭐죠?"
탈레브 패밀리에 소포가 전달되었다.
"시칠리아식 전갈이다."
소포를 가져온 이는 윤에게 그것을 전달한 뒤 사라졌다. 윤은 소포를 풀었고, 그 안에는 방탄조끼에 죽은 대구가 둘둘 말려있었다.
윤의 무릎 위에 얹어진 그것을 보며 머리가 짧은 남자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고르라고 불리는, 패밀리 내 행동대장(Crew Boss)이자 힐데베르트의 오른팔이 되는 이였다. 그는 방탄조끼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아보았다.
가문 내에서 저토록 큰 방탄조끼를 입는 이는 한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트래버는 물고기 밥이 됐다는 거지."
***
"처음 보는 얼굴들이 많군."
며칠 뒤, 리카르도와 함께 차에서 내린 이고르는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때마침 마중을 나온 붉은 머리의 남자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필요해서 배치했네."
그는 이고르와 악수를 하고, 리카르도에게 비쥬를 해준 뒤 첨언했다.
"돈의 피격 사건과 트래버의 사망으로 이성을 잃은 윤이 오늘 새벽 4시에 재연 와이즈만을 죽였어."
남자의 이야기에 이고르는 헛웃음을 토한 뒤 중얼거렸다.
"미친놈⋯."
세 사람은 저택으로 들어갔다.
저택의 2층에는 응접실이 있었다. 그 안에 먼저 도착해있던 윤과 예현은 한참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응접실에 들어선 세 사람 중 리카르도를 발견한 윤은 그에게 아는 체했다.
"릭."
윤은 리카르도의 턱을 그러쥐며 얼굴의 좌우를 살폈다. 리카르도는 심드렁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
"좋아 보이네."
피식 웃으며 말하는 윤과 어깨를 으쓱이며 응접실 한쪽에 놓인 1인 소파에 앉는 리카르도. 윤은 예현을 향해 말을 전했다.
"그 터키인이 할 말이 있다더라."
"뭐라던데?"
"구시렁구시렁 저 혼자 떠들더니 제안할 게 있으니 릭을 보내라던데. 거절하지 못할 만큼 괜찮은 제안이라면서."
윤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예현은 눈썹을 삐뚜름히 뜨며 물었다.
"재연은?"
"거래의 일부지. 아버지 건으로 상쇄시키잔다."
'⋯상쇄라⋯⋯.'
예현은 잠시 침묵했다.
상쇄라는 단어가 주는 묵직한 불쾌감에 속이 꼬이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감정적으로 굴어서는 하등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와이즈만 패밀리와 탈레브 패밀리의 피해는 언뜻 보면 비등하겠으나 후계자 하나를 잃은 것과 한 가문의 수장과 그의 추종자 되는 이를 건드린 것은 결코 동일 선상에 둘 수 없는 문제였다.
그러나 힐데베르트라면 이러한 충돌을 원하지 않으리라 예현은 감히 추측했다.
이윽고 예현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일단 만나보자."
그 말에 윤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턱을 떨어트리다가,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며 말했다.
"아니. 콘실리에레 양반 아쉽겠지만 이번만큼은 안 돼. 대화할 필요 없어. 휜더블러 놈한테 놀아날 텐데 뭐 하러? 휜도블러만 넘기라고 전해. 안 그러면 전쟁이다."
그러나 예현은 윤의 살벌한 기세에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가문들이 가만있지 않을 거야."
"휜도블러를 넘기면 될 일이야."
"아버지께서도 원치 않으실 거야. 사업에 감정을 개입하지 마."
"아버지를 쏜 것도 사업이라고?"
"그것 역시 사업의 일부야, 윤!"
어느 때보다 더 강경한 태도를 고집하는 예현에 윤은 분노했다. 그는 위협적으로 예현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금방이라도 멱살을 쥐고 폭력을 행사할 것 같은 분노가 느껴졌다.
"그럼 사업은 제쳐. 그리고 내 말 좀 들어. 수습 얘기 그만 나불대고 이기게나 도우라고. 알아들어?"
가문의 사람 중 누구보다 이성적이었던 이는 이상하리만치 감정적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윤을 질책하지 않았다.
가문에 오랜 시간 헌신하고, 그만큼 힐데베르트의 가장 가까운 측근인 이고르와 카이로스조차도 그를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무엇보다 가문끼리 엮이게 된 작금의 사태에서 결코 감정적으로 굴어선 안 된다는 것을 윤 자신도 알고 있으리라 두 사람은 생각했다. 누가 뭐래도 윤은 패밀리의 언더 보스로서의 직책이 있는 자이니까.
그런 윤이 이토록 감정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것은 그의 눈앞에서 힐데베르트가 피격당하고, 피격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 윤의 이성을 유지하기 어렵게 했을 터였다. 분노가 그의 눈을 가리는 이유의 타당성을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어찌 됐든 윤은 예현에게 분노하던 것을 멈췄다.
그러는 대신 몸을 돌려 협소한 집무용 테이블 뒤로 들어가 앉았다. 흐트러진 머리를 뒤로 넘기며 앉아 있으려면 예현은 바로 옆의 소파에 앉았다.
"휜도블러를 뒤에서 봐주는 놈이 또 있어."
"누군데?"
윤의 시선이 예현을 향했다.
"경찰서장. 불리는 명칭은 변경백이라나. ⋯휜도블러에게 거금을 받은 게 분명해. 터키인이 경찰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거야, 윤. 그러니 이건 알아둬."
그는 갑갑한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말했다.
"놈이 경찰의 비호를 받는 이상 함부로 건드릴 순 없어. 뉴욕 경찰서장에게 총을 겨눈 자는 없었다고. 그럼 다섯 가문도 다 널 잡으려 들 거고, 탈레브 가문은 추방이야."
그는 윤에게로 몸을 더 바짝 붙여 앉았다.
이토록 필사적인 것은 오랜 고질병 같은 거였다. 예현은 패밀리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미래를 함부로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의 정계 연줄로도 안 돼. 그러니 나야말로 부탁할게."
그렇기에 윤을 설득해야 했다.
"좋아. 기다리지."
다행히도 그 설득이 통한 윤은 가까스로 그의 이야기를 받아들여 주었지만,
"못 기다려~⋯."
다른 한 사람이 그러질 못했다.
"뭐?"
"못 기다린다고⋯."
윤과 예현의 대화를 말없이 듣고 있던 녹안의 남자는 여태 보여준 적 없던 얼굴로 두 사람의 의견에 반대했다.
"션튼 휜도블러는 아버지를 쏜 장본인이야. 그자의 제안이 뭐든 나는 그 개자식을 죽일 거야."
"그 말이 맞아."
윤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일어섰다.
터벅터벅.
그는 리카르도에게 다가갔다. 예현도 그를 따라 이동했다. 윤은 리카르도의 앞에 섰다. 예현은 그의 뒤쪽 협탁에 걸터앉았다. 이고르는 응접실 문 근처의 의자에 앉아 있었고, 카이로스는 장식장에서 위스키 하나를 꺼내며 돌아섰다.
리카르도는 제 앞에 선 윤을 올려다봤다.
윤이 허리를 낮추며 질문했다.
"질문 하나 하지. 변경백은? 그 경찰은 어쩔 거지?"
"나랑 만나고 싶다 했다면서~⋯?"
윤의 질문에 리카르도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형형한 녹색 시선이 흑안을 담았다.
은연중에 패밀리와 엮이는 것을 거부하던 저를 무시하는 속내가 읽혔다. 리카르도는 그 특유의 시선이 오늘만큼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비를 걸 생각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나, 경찰서장, 휜도블러. 셋이서 만날 거야. 약속을 잡아. 장소는 정보원들 풀어서 파악하고 우린 술집이나 식당 같은 공공장소에서 만나기를 전해. 사람들이 많으니 안전하다고 느낄만한 곳. 만나면 내 몸을 수색하겠지. 무기는 못 가져간단 뜻이야."
그는 제법 진지하고, 차분한 태도로 자신의 계획을 말했다.
"하지만 이고르가 그 장소에 미리 무기만 심어둔다면⋯."
무엇보다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제 입 밖으로 내던져지는 모든 것들이 진심임을 증명하고 싶었다.
"내가 그 둘을 죽일 거야."
그러나 그런 그의 진심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 윤과 이고르, 카이로스는 그를 비웃었다.
그가 보여주고 있는 서늘함은 물론 패밀리의 수장과 닮아있었으나 여태 패밀리의 사업에 관여하길 꺼리던 이의 의견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줄 만큼 그들은 관대하지 않았다.
"하하."
"하하하하하!"
카이로스가 먼저 웃음을 터트리려면 이고르는 박장대소했다. 뒤를 따라 윤도 어처구니가 없다며 웃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리카르도에게 허리를 숙이며 나직이 물었다.
"하⋯. 릭. 너 같은 샌님이? 가업에 엮이기 싫다면서 경찰서장에게 총질하겠단 거냐? 군대에서처럼 멀리서 쏴 갈기는 줄 아는군. 지척에서 머리통을 날리는 일이야. 아이버리그 옷을 더럽히려는 거냐?"
"윤."
리카르도는 그들의 태도를 이해하기에 분노하진 않았다. 다만, 대놓고 무시를 당하는 것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귀여운 녀석. 감정에 휘둘리기는."
윤은 리카르도의 머리를 툭툭 쓰다듬어 주곤 예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마치 감정적인 자신을 나무라던 그에게 '나무라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다'라는 것을 어필하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봐라, 이예현. 이건 사업인데 얘는 감정적으로 굴고 있잖냐."
그러자 리카르도는 앉은 채로 상체만 돌려 예현을 돌아보았다. 꽤 불퉁한 얼굴이었다.
"경찰을 왜 못 죽이는데?"
"릭."
리카르도는 여전히 소극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그의 태도가 답답했다. 기어코 눈알을 위로 굴리며 작은 짜증을 내보이던 리카르도는 첨언했다.
"들어봐, 예현. 그 경찰은 마약에 연루된 부정한 경찰이야. 부정한 돈벌이로 대가를 치를 경찰이라고. 굉장한 얘깃감 아냐? 우리가 고용한 기자에게 흘리면? 기자들도 좋아할 거라고."
"그럴지도 모르지."
"예현. 나는 감정적으로 구는 게 아냐. 철저히 사업을 위한 거지."
/
38구경 리볼버였다.
"방아쇠랑 끝부분에 특수 테이프를 감아뒀다. 지문이 남지 않지. 들어봐."
손잡이에 회색 테이프가 둘둘 감긴 38구경 리볼버.
"왜 그러지? 방아쇠가 뻑뻑한가?"
리카르도는 이고르에게 리볼버를 건네받은 뒤 그것을 조작했다. 표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길 듯 말 듯. 그는 이고르와 단둘이 작은 골방에 박혀서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타앙!!
"꽤 시끄럽군요~⋯."
"시끄러워야 주변의 성가신 행인들이 알아서 사라져 주거든."
리카르도는 리볼버를 든 팔을 내리며 총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이고르는 팔짱을 낀 채 책상에 걸터앉아있었다. 그러면서 리카르도를 가만 구경했다.
퍽 진지한 얼굴이 가장 먼저 그의 흑안에 담겼다.
손안의 리볼버는 그의 주먹보다 작아서 마치 장난감 총을 들고 있는 듯 보였다. 몇 번이고 팔을 들어 골방 한쪽에 마련된 표적에 총을 겨눴다 말았다 하는 남자.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듯 보이는 그를 보며 이고르는 기특하단 양 피식 웃으며 물었다.
"좋아. 둘을 쐈다. 그다음엔?"
"앉아서 식사를 끝내죠⋯."
음울한 대답이 돌아왔다.
"큭큭. 장난치지 말고. 그대로 팔을 내려서 총을 자연스럽게 내려. 사람들은 여전히 네가 쥔 줄 알 거야. 네 얼굴을 쳐다보고 있겠지. 재빨리 벗어나되 절대 뛰지 마라."
웃음기를 지운 이고르는 제법 진지했다.
사실 이고르는 진지한 것보다는 적당한 가벼움이 공존하는 존재였다. 장난도 좋아했고. 아무튼 이고르는 윤과 예현보다는 리카르도에게 더 살가운 사람이기도 했다.
그에게 그들은 모두 조카 같은 존재였으니 당연했지만 그럼에도 특히 리카르도를 아꼈다.
이유는 단순했다.
"누굴 쳐다보지도 시선을 피하지도 마. 다들 겁먹고 덤비지 않을 테니."
그렇기에 조언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긴 휴가를 떠나라."
"상황이 얼마나 악화될 것 같습니까~⋯? 이고르⋯."
"흥. 좆같이 악화되겠지."
뻔히 그려지는 지난한 역사에서 비롯된 미래는 피할 수 없음을 알기에.
"다른 가문들이 등을 돌릴 거다. 상관없어. 어차피 이런 일은 5년이나 10년에 한 번씩 일어나거든. 원한을 끊어내려면 필요한 일이야. 10년 전에도 겪은 일이고 초장에 끝장을 봐야 하지."
이고르는 제 옆에 나란히 걸터앉는 리카르도를 보며 말했다.
"히틀러도 뮌헨에서 끝을 내지 못했듯이."
평상시와 다른 진지한 얼굴에 리카르도는 못내 속이 아리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놓쳐선 안 됐어. 더 골치만 아파졌으니. ⋯⋯릭. 우린 전쟁영웅이 된 너를 자랑스러워했다. 힐데베르트도 그럴 거야."
/
리카르도와 윤, 예현과 이고르 그리고 카이로스 이 다섯 사람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예의 2층 응접실과 멀지 않은 다이닝룸에서. 얼마 전 리카르도의 제안대로 탈레브 패밀리는 휜도블러와 경찰서장에게 연락을 취했었다.
그리고 이제 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다섯 사람은 말없이 식사를 이었다.
정보원들을 풀었지만 세 사람의 접견 장소가 어디인지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약간의 긴장감과 초조함이 맴도는 식사 시간이었다.
가장 먼저 식사를 끝낸 리카르도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접시 위의 음식은 거의 그대로였다. 그는 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피웠다. 이어서 식사를 마친 윤은 포크와 나이프를 양손에 하나씩 쥔 채 침묵을 깼다.
"아무 정보도 없어. 실마리조차도. 휜도블러 부하들도 장소가 어딘지 몰라."
그의 목소리에는 불만이 담겨있었다.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작금의 상황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리카르도는 예현을 향해 물었다.
"얼마나 남았지?"
"잭 뎀프시 레스토랑 앞에서 1시간 반 뒤에 널 태울 거래."
그러자 이고르가 말했다.
"미행을 붙여서 파악해 볼까?"
"바로 따돌릴 거다."
윤이 곧장 부정적인 말로 그 의견을 묵살시켜버렸지만.
따르르르르릉!
그때, 문이 없는 다이닝룸에서 멀지 않은 복도 끝에서부터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윤은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두며 냅킨으로 입가를 닦곤 의자를 밀며 일어섰다.
따르르르르릉!
"내가 받을게."
달칵.
윤이 수화기를 들었다. 통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래. 수고했어."
달칵.
윤은 그렇게 말하곤 곧장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곤 자리로 돌아와 의자를 당겨 앉으며 한층 기분 좋아진 얼굴로 말했다.
"브롱크스의 루이스 식당."
"확실한 정보야?"
예현이 물었다.
"서장 관할에 심어 놓은 부하야. 변경백은 원래 24시간 대기해야 하는데 오후 8시에서 10시 사이에는 거기 있기로 했다더군. 그 장소 아는 사람?"
윤은 비릿하게 웃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고, 카이로스는 식기를 내려놓곤 주황색 눈을 휘어 접으며 대답했다.
"내가 잘 아네. 완벽한 곳일세. 조촐한 식당인데 음식이 아주 맛이 좋지. 모두 무관심하고, 그야말로 완벽해. 거기 구식 변소가 있네. 통에 사슬 달린 변기 말일세. 그 뒤에 총을 붙여놔도 되겠어."
그의 답변에 윤은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카이로스의 이야기를 들은 이고르는 리카르도에게 마지막 당부를 했다.
"좋아. 릭. 그곳에 가서 먹고 대화를 나누며 긴장을 풀어. 그리고 화장실에 간다 허락을 받고, 가서 총을 찾아. 제대로 끝내라. 머리에 두 발씩이다."
그러자 윤이 카이로스에게 첨언했다.
"총 심어놓는 건 제대로 된 놈을 써야 할 겁니다. 이 녀석이 제 좆이나 잡고 나오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요."
"그건 걱정 말게."
"카이로스가 데려다주고, 일 끝나면 데리고 와요."
"움직이지."
카이로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즐거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드르륵, 드르륵. 그를 선두로 이고르와 예현, 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장 마지막으로 일어난 리카르도를 예현은 끌어안았다.
리카르도는 피식 웃으며 그의 등을 토닥였다.
"고마워~⋯, 예현⋯."
"총 곧바로 떨어트리지만 마."
"알아~."
예현은 리카르도의 어깨를 툭툭 쳐주며 옆으로 물러섰다. 그의 얼굴에 야트막한 불안이 비쳤다.
윤은 리카르도의 팔을 꾹 잡은 채 말했다.
"잊지 마라. 나오자마자 머리에 두 발씩이야."
"윤."
그제야 조금 실감이 나는 것이었을까. 녹안은 아주 약하게 흔들렸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나는 미국에 언제쯤 돌아올 수 있을까."
"길어야 1년일 거다. 대모님껜 내가 잘 말해두마. 얼굴도 못 보고 떠나야 할 테니까."
언제나처럼 건조한 대답에 리카르도는 다시금 안정을 찾는 듯 보였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각오는 끝났다.
"몸조심해라."
"조심해, 릭."
리카르도는 두 형제와 다시금 끌어안아 서로의 안위와 안전을 기원해 준 뒤 카이로스와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
"여기 이탈리아 음식은 어떤가?"
냅킨을 목에 걸던 변경백의 질문이었다.
"좋아. 송아지 고기를 시켜봐. 뉴욕에선 최고니까."
"그러지."
휜도블러와 변경백은 원형 테이블에 나란히 앉았고, 변경백의 옆자리에는 리카르도가 앉아 있었다. 휜도블러의 뒤편에는 웨이터가 와인의 뚜껑을 따고 있었다.
웨이터는 능숙하게 뚜껑을 딴 뒤 두 개의 와인잔을 채웠다. 휜도블러는 와인잔을 리카르도의 앞에 놓아주었다. 그가 손을 들자, 웨이터는 와인병을 들고 자리를 떠났다.
이후 휜도블러는 변경백에게 양해를 구했다.
"이탈리아어로 얘기할게."
"그래."
그는 곧장 승낙해 주었다.
그리고 휜도블러는 테이블에 올린 두 손을 깍지 껴 잡은 채 이야기했다.
"미안해."
"됐어."
리카르도는 대뜸 사과부터 건네오는 휜도블러에 당황한 눈치였으나 그것을 티 내진 않았다. 다만, 묘하게 속이 꼬이는 것 같단 느낌을 받았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휜도블러는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네 부친과의 일은 순전히 사업 때문이었어. 난 아버님을 매우 존경하지만, 사고방식이 좀 낡은 것 같더군. 내가 왜 그래야 했는지 이해해 줬으면 해."
"나도 왜 그런 건지 이해해."
"그래?"
휜도블러는 그의 단답에도 신이 난 듯 떠들었다.
"와이즈만 가문과 손을 잡으면 간단해. 바로 이 자리에서 협상을 맺으면 좋겠어. 난 평화를 원해. 소란은 여기서 끝내고 싶어."
메스꺼운 토기가 밀렸다.
이곳으로 오기 전 식사를 하긴 했으나 한층 예민해져 있던 탓에 얼마 먹지 않고 식사를 마쳤었다. 그조차도 무려 2시간 전의 일이었다. 그것이 얹힌 것 같이 속이 답답했다.
"난⋯ 난 뭐랄까."
리카르도는 대답을 고민하며 시선을 내렸다. 시계가 도는 통에 어지럼증을 느꼈다. 그런 것들을 알지 못하는 휜도블러와 변경백은 그가 대답하기를 차분히 기다려주었다.
"내게 중요한 건⋯. 뭐랄까⋯."
방황하는 듯 보이던 녹안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확실한 약속이야. 아버지를 다시는 해치지 않겠다는 약속."
"내가 어떻게 해야 믿을 건가? 쫓기는 건 도리어 나야."
리카르도는 말없이 휜도블러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꽤 긴박한 듯 보이는 안색이었다. 아마 재연의 죽음 이후로 와이즈만 가문에서도 그를 좋게 봐주진 않는 모양새였다. 사업으로 엮이지 않았다면 죽었겠지.
녹안은 그제야 서늘하게 빛을 냈다.
휜도블러는 퍽 필사적으로 이야기했다.
"난 기회를 한번 놓쳤잖아. 날 너무 높이 사는군. 난 그렇게 비상하지 않아. 내가 원하는 건 휴전이야."
그에게 대답해 줄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이 무의미한 대화를 더 이어가야 할 이유가 없음을 이해했다. 리카르도는 변경백을 향해 영어로 질문했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 그래도 되나?"
"급하면 다녀와야지."
변경백은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알아듣진 못했다. 아쉬운 일이었다.
그가 수락해 주자 리카르도는 자리에서 일어나 휜도블러의 옆을 지나치려 했다. 그러자 휜도블러가 그를 붙잡아 허벅지나 허리 등을 더듬었다. 이곳에 오기 전 변경백이 그의 몸수색을 했었음에도 휜도블러는 구태여 그의 몸에 손을 댔다.
"수색했는데 깨끗했어."
변경백이 말했다.
이 일을 얼마나 해왔다고 생각하는 거야? 핀잔을 주기도 했다. 휜도블러는 리카르도를 놔주었다. 리카르도는 화장실로 모습을 감췄다.
화장실에 들어온 리카르도는 사전에 공유해두었던 대로 두 번째 변소기로 향했다.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었다. 너무 늦으면 그들은 분명 의심할 테니까.
리카르도는 천장 가까이 설치되어있는 물탱크 뒤쪽을 정신없이 더듬었다. 그리고 총을 찾았다. 이고르와 먼저 확인했던 회색 테이프가 감긴 38구경 리볼버였다. 그는 리볼버를 허리춤에 쑤셔 넣었다. 티가 나지 않게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심란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머리를 툭툭 정리했다.
심호흡을 한 뒤 화장실을 나섰다.
"별일 없는 거지?"
"그래."
리카르도는 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한참 멍하니 시선을 굴렸다. 두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도, 목소리를 듣는 것도, 같이 자리를 하는 것도 구역질이 났다. 시뮬레이션도 각오도 끝났을 텐데 막상 마주하려니 눈앞이 빙빙 돌았다. 손이 떨렸고, 식은땀이 배어났다.
덜커덩!
리카르도는 요란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밀려나면서 뒤로 넘어갔다. 그를 올려다보는 휜도블러에게 리카르도는 허리춤에서 총을 빼 들어 곧장 그의 이마에 총을 쐈다.
타앙!!
"켈록!"
갑작스러운 상황에 변경백이 콜록거렸다.
이마 한가운데 바람구멍이 생긴 휜도블러는 눈을 뜬 채 절명했고, 쿠당탕 소리를 내며 의자에서 바닥으로 엎어졌다. 식당의 바닥을 모두 덮고 있던 카펫에 피가 번졌다.
"켈록! 흐윽! 케헥! 흑!"
그사이 나온 송아지 고기를 먹고 있던 변경백은 음식이 기도로 넘어간 탓에 연신 켁켁거렸다. 그 탓에 반격하지도 도망을 가지도 못한 그를 향해 리카르도는 망설임 없이 또 한 발의 총을 쐈다.
타앙!
식당은 순식간에 혼비백산이 되었다.
쿠당탕!
쨍그랑!
휜도블러와 마찬가지로 이마에 바람구멍이 생긴 변경백이 제 목을 틀어쥔 채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덕분에 테이블이 무너졌고, 접시는 모조리 깨졌다.
리카르도의 동공이 커져 있었다. 흥분한 듯 숨을 색색 내쉬었다. 스스로를 진정시킬 수 없었다. 뛸 듯 걷다가, 손에 들린 리볼버를 던지듯 떨어트렸다.
두 발이라는 상징성은 잊은 듯 보였다.
그저 황급히 식당을 나설 뿐이었다.
***
시간은 흘러 힐데베르트는 퇴원했다.
기자들이 그의 저택에까지 몰릴 정도였다.
힐데베르트는 온 가족들이 제게 인사를 하러 온 중에 보이지 않는 막내아들에 대해 궁금해했다. 예현은 차분히 그간의 일들을 설명해 주었고, 힐데베르트의 금안은 착잡한 우울감에 젖어 들었다.
그로부터 1년 뒤 리카르도는 가문으로 돌아왔다.
시칠리아까지 쫓아온 추격자들을 피해 미국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곳에 있는 동안 친부의 도움을 꽤 받았었다. 지오바니 소르디는 힐데베르트에게 호의적인 존재였으므로 그가 불편해하거나 말거나 그를 곧잘 도와주었다.
어찌 됐든 힐데베르트는 돌아온 리카르도에게 가문의 수장자리를 넘겨준 뒤 은퇴했다. 이후에는 예현에게 앞으로 라스베이거스에서 있을 새로운 카지노 사업과 그곳을 관리할 윤의 조언자가 되어주길 요청했다.
예현은 물론 반발했지만, 리카르도가 그를 만류했다.
그의 결정은 절대적인 것임을, 그만큼이나 가문에 적합한 콘실리에레는 없을 거라는 것임을 일깨워주고서 말이다.
리카르도는 암흑가의 일을 잘 해냈다.
피격 사건 이후 쇠약해진 힐데베르트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하기 5년여 동안.
장례식이 이뤄지는 동안에도 말이다. 그는 암흑가의 우두머리로서 가문의 붉은 머리 변절자를 척결하는 것부터 형제가 낳은 둘째 아이의 대부가 되어주는 세례식이 끝나고서야 그녀의 배우자를 죽이기도 했다.
과거 임신한 그녀에게 가정폭력을 행사하고, 다른 여자와 불륜을 저지른 죄로서 윤에게 길거리에서 죽도록 얻어맞았던 것에 앙심을 품고 수년간 가문의 대외비를 팔았던 사실이 발각된 탓이었다.
그녀가 원망의 눈물을 흘렸음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