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날은 어쩐지 조용하긴 했다. 힐데베르트는 항상 누군가는 찾아와 북적거리는 자기 오두막에, 오랜만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병가 휴직 동안에는 몸의 회복을 우선시하는 상황이라 힐데 본인이 잠이 들어버리면 다들 조용히 오두막을 비우곤 했다. 하지만 그래도 적어도 한 명 정도는 남아있곤 했었는데. 힐데는 오랜만의 조용함을 만끽하며 우유에 시리얼을 말아먹을 준비를 하다가 손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카이로스가 개간 작업에 나서서 어제부터 집을 비운다고 들었는데. 평소라면 밀크를 부탁한다고 맡기고 나가곤 했는데 어젠 별 이야기가 없었다. 밀크가 은근히 힐데의 정신 건강 회복에 좋다는 걸 알아서 그렇게 하는 모양이었는데, 아무 말도 없었다는 건 좀 이상했다. 데리고 나간다면 이번 개간에는 데리고 나갈 예정이라고 이야기라도 했을 텐데?
힐데는 시리얼을 후딱 해치워버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꼭 밀크가 보고 싶어서라기보다는, 걱정 되잖나. 카이의 집에 거의 보디가드 겸 청소부(?)로 살고 있는 이고르에게 물어보면 데리고 나갔는지 어떤지 쉽게 알게 되겠지.
힐데는 가볍게 겉옷을 챙겨입고 나섰다. 상쾌한 햇살과 비 온 지 얼마 안 돼 촉촉하게 젖은 잔디가 힐데베르트를 맞이했다. 그가 사는 이 장소는 코어를 독점 생산하는 기업 에이텍의 자녀 두 사람과 센터코어를, 아니 나아가 전 세계를 크리처의 손으로부터 지켜내는 블랙배저의 전 사령관이자 현 고문이 사는 집이었다 - 정확히는 그 집의 마당 한구석에 있는 오두막이었지만. 세 사람이 바쁜 현생으로 인해 거의 항상 집이 비어 있는 것에 비해, 저택은 매우 깨끗하고 반짝였다. 주기적으로 그들의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가 들리고, 저택 외관을 수리하고 관리하는 관리인들도 방문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결벽증에 가까운 깔끔함을 지닌 최윤은 그 사람들 외에도 항상 자신이 직접 만든 로봇을 가동해 집의 상태가 최상으로 유지되도록 했다. 그러니 오죽하면 오두막에 있는 힐데 소유의 - 정확히는 선물 받았지만 - 청소 로봇을 개조하는 것까지 마다하지 않았을까.
그 건너편 집인 새뮤얼의 집은 다소 정원이 정리되지 않을 때가 있거나, 정원수가 가끔 담을 넘어와 사과를 나눠주는 것에 비하면 비인간적일 정도로 깔끔했다. 그리고 그건 바로 반대쪽에 붙어 있는 카이로스의 저택도 마찬가지였다.
요우 말대로 그 집은 이고르 혼자서 청소하기엔 너무 큰 집이었다. 이층으로 된 저택은 정원이 담으로 가볍게 가려져 있지만 그 너머로 보이는 직각형 현대미술 풍 건물만으로도 부티가 철철 났다. 오죽하면 아머메이저가 바로 뒷켠에 붙어 있는 - 3인의 집 마당 끝 쪽이었으므로 불가피하게 잭의 집과 훨씬 거리상으론 가까웠다 - 그걸 보고 창고냐고 물었을까. 힐데는 그런 말에 상처 입은 적 없는 척하면서 가벼운 걸음으로 카이의 집 앞으로 향했다.
들어가는 문도, 그 내부에 있는 더 너른 정원도 힐데베르트에겐 프리패스나 마찬가지였다. 이미 집의 비밀번호를 힐데에게 알려줬고, 열쇠까지 주려고 하는 걸 거절했으니까. 그렇지만 요우나 델테이에게도 그렇게 했던가? 힐데는 문득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왜 이런 느낌이 들지?
오늘따라 델테이가 아무런 문자도 보내지 않아서?
요우가 아침에 전화를 걸다가 오늘은 아무 데도 나가지 말고 집에서 푹 쉬기나 하라고 끊어버려서?
로즈가 아침 문안을 보내면서 꼭 편안히 쉴 수 있게 해드리겠다고 해서?
이고르야 원래 문자 같은 거 잘 안 보내니까 넘어가고.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이 등골을 타고 들어와, 힐데베르트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푸르른 잔디가 펼쳐진 넓은 마당이 눈에 들어왔다.
“힐데? 무슨 일이야?”
비치 의자처럼 생긴 일광욕 의자에서 후다닥 몸을 일으키는 델테이의 모습이 보였다.
“단장님!”
그 바로 곁에 앉은 로즈가 활짝 웃으면서 마찬가지로 몸을 일으켰다. 둘은 나란히 앉아 일광욕이라도 하고 있었던 것 같은 포즈였고, 그 옆의 정원 테이블에는 음료 컵이 놓여 있었다.
“웬일이지, 대장. 푹 쉬는 줄 알았더니.”
마당에서 커다란 갈퀴 같은 걸 든 이고르가 쓱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현관문 앞에는….
“집에서 쉬라 했더니 뭐 하러 여기까지 온 겁니까? 좀 멀쩡해졌다고 그렇게 또 사람 말을 안 듣는 겁니까?”
요우가 현관에서 나오면서 문을 가로막고 말했다.
힐데는 이 모든 이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델테이의 얼굴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고, 머리카락은 아주 약간 삐치듯 붕 떠 있었다.
이고르는 별일 아닌 것처럼 갈퀴를 들고 있었지만… 가을도 아닌데 웬 갈퀴? 카이의 정원 마당은 항상 깔끔했다. 덤불 같은 게 돌아다닐 껀덕지가 없단 말이다.
요우의 날카로운 눈매는 여전했지만… 어깨가 조금씩 위아래로 움직였다.
마치 무언가… 격렬한 운동을 해서 숨이 가쁜 것을, 숨기려는 것처럼 아주 천천히.
그리고 무엇보다….
로즈.
로즈가… 내가 왔는데 벌떡 일어나서 무릎을 꿇지 않는다고?
나만 보면 항상 눈을 빛내면서 - 아니 지금도 물론 눈을 빛내는 건 똑같지만 - 제한당한 1미터 직전까지 달려와 무릎을 꿇던 아이가… 의자에 앉은 채 가만히 날 바라만 보고 있다고?
힐데베르트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요우의 어깨가 살짝 움찔했다. 델테이의 시선이 다른 데로 돌아갔다. 이고르는 갈퀴를 어깨에 걸쳤고, 로즈는… 로즈만은 여전히 반짝반짝하는 눈으로 자신의 우상을 바라보면서 양손을 맞잡았다.
“너희야말로 다들 여기 웬일이야?”
“난 여기 사니까, 대장.”
“너 말고.”
이고르의 덤덤한 대답을 휘릭 넘기고 요우를 쳐다보자, 요우는 다시 힐데베르트를 노려보며 말했다.
“사역사가 부탁한 서류 정리가 있어서 왔습니다. 이번에 코어 7로 이사한 동족들의 주거 비용을 사역사가 대줘서.”
“나, 나도야!”
델테이가 학생처럼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힐데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로즈 너는?”
“저요? 저야 언제나 단장님께 도움이 되기 위해 오늘도 불철주야…!”
“우리를 도와주고 있었어!”
델테이가 얼른 로즈의 어깨를 껴안듯 당기며 말했다. 마치 입이라도 막으려는 듯이.
힐데베르트는 더 이상 보아 넘길 수가 없었다. 그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한숨을 쉬었다.
“아아… 한숨 쉬는 단장님도 아름다우신….”
“조용히 해라, 꼬맹아.”
이고르가 답지 않게 꿍얼거리는 소리로 로즈에게 주의를 줬다. 아마 이다음에 올 힐데베르트의 반응을 알아서였으리라.
“전원 집합.”
나직하게 깔리는 목소리에 이고르는 갈퀴를 옆에 쿡 찍고 어슬렁 앞으로 나섰고, 로즈는 벌떡 일어나 그 옆에 섰다. 그리고 요우는 입술을 깨물고는 얼른 문에서 나와서 - 끝까지 문 안은 제대로 보여주지 않으려는 듯 가리면서 - 로즈의 옆에 섰다. 그리고 델테이는 미적미적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나도…?”
“전부.”
델테이도 얼른 일어나서 후다닥 요우 옆에 와서 섰다. 그러다가 하마터면 테이블에 부딪힐 뻔해, 이고르와 요우, 힐데베르트 셋 다 부축하려고 움찔 움직인 일이 있긴 했지만.
그리고 나란히 선 넷을 보며 힐데베르트는 입을 열었다.
“뭐 했어.”
“…….”
델테이와 로즈, 그리고 이고르까지도 모두 요우를 곁눈질로 쳐다봤다. 힐데베르트 역시 요우를 쳐다보았다. 한참 입술을 꾹 물고 있던 요우가 결국 결심한 듯 숨을 들이켰을 때.
- 끄으으….
힐데베르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저택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그와 함께 모두가 외쳤다.
“단장님! 제가 해결해 드릴게요!”
“이고르, 잡아!”
“꼬맹아!”
“안돼! 힐데, 잠깐만!”
힐데베르트가 움직이려 하기 무섭게 로즈가 엄청난 속도로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려 했고, 그걸 이고르가 소드마스터의 빠르기로 잡아챘다. 요우는 휙 돌아서 마찬가지로 집 안으로 들어가려 했고, 델테이는 힐데의 앞을 가로막으면서 팔을 벌렸다. 셋, 아니 네 사람이 뒤엉키는 순간, 집 안에서 또 한 번의 소리가 들렸다.
- 사… 살려주….
“뭘 한 거야?”
힐데베르트의 노성과 함께 로즈와 이고르가 잔디로 쓰러졌다. 요우는 집으로 들어가려다 멈춰 서 눈을 질끈 감았고, 델테이가 말리려는 듯 힐데의 팔을 꽉 쥐었다.
“한 번만 참자! 한 번만!”
“저거 누구야.”
힐데베르트의 말에 로즈가 이고르에 의해 바닥에 눌리면서도 고개를 발딱 들고 외쳤다.
“단장님의 말씀을 안 듣고 심기를 어지럽히는 자는 제가 마땅히 깔끔하게 처단을…!”
“아, 이 꼬맹이 진짜.”
“아니, 로즈가 진짜 해치려고 한 건 아니야, 힐데!”
“아니겠습니까 저게?”
힐데베르트는 설마 새로 생긴 원로나 그 수족 중 하나인가 했다가, 새어 나오는 목소리가 문득 귀에 익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제야, 왜 델테이가 이렇게 필사적으로 자기 팔에 매달렸는지 깨달았다.
“린?”
사방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삐꺼억… 요우가 막으려고 했던 문이 천천히 열리면서 안에서 금발이 바닥으로 기어 나왔다.
온몸이 밧줄로 칭칭 묶인 채.
“사… 살려주십쇼, 단장님… 저 진짜 억울합니다…”
눈물 콧물을 쏟으며 기어 나온 건, 지렁이처럼 몸을 움직여 겨우 문밖으로 기어 나온 린이었다.
그리고 힐데베르트는 이 모든 소동이 왜 일어났는지 단번에 이해하게 되었다.
저 자식이 내가 쉰다고 또….
깊은 시름에 잠기는 힐데베르트의 모습과 함께, 이고르에게 눌리고 있던 로즈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렸다.
“죄송합니다, 단장님. 단장님이 푹 쉬실 수 있게 아무도 모르게 린 선배님을 처리하려고 했는데 제가 그만 실패해서.”
“그러니까 맘대로 처리하면 안 된다고 누가 이 녀석 머리에 좀 넣어달라고.”
“하지만 단장님이 불법적인 짓은 하지 말라고 벌써 몇 번째 말씀하셨는걸요?”
“사람 죽이는 것도 불법이야, 로즈.”
이고르와 델테이의 말에 로즈는 해맑게 대답했다.
“들키면 그렇죠. 전 안 들킬 자신이 있답니다!”
“제발 다들 닥쳐주면 안 되겠습니까…?”
요우가 남부끄럽다는 듯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고, 힐데베르트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미안하다, 카이.
내가 못나서 이런 부하들만 잔뜩 두고…
네 잔디가 좀 파헤쳐질 거 같다….
다녀오면 사과할게… 용서해 주겠지…?
그날 최윤과 최아미, 이예현이 사는 아름다운 저택 바로 옆집, 전직 F1 레이서로 이름 높은 잭 블랙의 집 마당에서 여러 명이 기합을 받고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그걸 실제로 영상에 담은 파파라치나 CCTV가 없었기 때문에 그 이야기는 그저 인적인 적은 부자 동네에서 가끔 도는 변태적인 루머 중 하나인 것으로 치부되고 말았다.
<끝>